세계의 리더

잭윌치의 리더쉽 31가지

핫이슈정리왕 2005. 10. 12. 15:03

잭 월치의 31가지 리더쉽 비밀 (GE)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라고 흔히 말한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일은 21세기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상당히 긴박한 숙제거리임엔 틀림없다. 그것은 '리더쉽' 이라는 테마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기업 경영의 모든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점에서 그 동안 해오던 방식의 리더십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있어 여러가지 문제점에 부딪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GE 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잭 웰치 회장의 리더십에 관한 관찰과 연구는 우리나라 모든 기업 경영인뿐 아니라 개혁을 지향하는 모든 조직의 관리자들을 위해 긴요한 지침이 되어 줄 것이다.

또한 각 조직 구성원들간의 원활한 의사 소통과 관계 유지에 있어서도 리더십은 적용되고 꼭 필요한 것인 만큼 상당히 실용적인 정보가 되어 줄 것이다.
45세의 젊은 나이로 GE의 회장에 취임한 이래 그가 발휘한 리더십 역량은 GE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GE는 10여 년 만에 매출과 이익 규모 등이 3배 이상 증가되었고 기업의 시장 가치는 800억 달러를 넘어 1위를 다투게 되었으며, 투자 수익률은 20퍼세트로서 미국 기업들의 평균 수치인 12퍼센트의 2배에 가깝다.

그리하여 GE의 잭 웰치 회장은 '포보스'지 등 경영 관련 잡지들로 부터 초일류 기업, 최고의 경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경영학회로부터는 20 세기 초반을 풍미했던 GM의 슬로안 회장과 더불어 금세기 최고의 경영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 동안 미국에서는 '잭 웰치 회장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하는 궁금증 때문에 그와 GE에 관련된 책들이 여러 종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소개된 바가 있다. 그러나 '잭 웰치의 31가지 리더십 비밀'은 기업 자체에 국한되는 사례분석이 아니라 생활하는 모든 이들이 일상의 인간 관계를 풀어가는 자세를 이야기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별성을 말할 수 있겠다.


1. 늦기 전에 변화하라 !
Change, Before It's Too Late!

2.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회피하지 말라!
Look Reality In The Eye And Don't Flinch!

3. 언제라도 실행 계획서를 고쳐 쓸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라!
Be Ready And Eager To Rewrite Your Agenda!

4.관리를 적게 하는 것만큼 경영 성과는 높아진다.
Managing Less Is Managing Better.

5.당신이 관여하는 사업 전체를 주의 깊게 관찰하라.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무엇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가, 무엇을 육성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결정하라!
Take A Hard Look At Your Overall Business. And Decide As Early As Possible What Needs Fixing, What Needs To Be Nurtured, What Needs To Be Jettisoned!

6.현실을 직시하라 !
Face Reality !

7.한 가지 집중적인 아이디어만을 쫓지 말라. 그보다는 비즈니스 전략으로 몇 가지 가능성이 분명하고 전반적인 목표를 설정하라.
Don't Pursue A Central Idea But, Rather, Set only A Few Clear, General Goals As Business Strategies.

8. 제 1 위 또는 2 위가 되라 !
Be Number one Or Number Two!

9. 너무 늦기 전에 조직 규모를 줄여라 !
Downsize, Before It's Too Late !

10. 기업의 개혁과 변화에 있어서 성역은 없다 !
In Deciding How To Change Your Business, Nothing Should Be Sacred !

11. 유망한 시장을 찾을 때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 그러나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승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승자가 될 수 없다면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When Seeking The Right Marketplace, There's no Virtue In Looking For A Fight. If You're In A Fight, Your Job Is To Win. But If You Can't Win, You've Got TO Find A Way Out.

12.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어 그것을 전파하라 !
Create A Culture, Then Spread It !

13.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들여라 !
Don't Get Stuck In The Past! Be Open To Change !

14. 실행 계획서를 끊임없이 점검하라,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계획을 수정하라 !
Reexamine Your Agenda Constantly And, If Necessary, Rewrite It !

15.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자원을 분배하라, 그리고 간섭하지 마라.
Transfer Idear And Allocate Resources And Then Get Out Of The Way.

16. 조직 구서원들에게 의사결정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라.
Make Sure Everyone In Your Business Gets All The Information Required To Make Decisions.

17. 조직 구성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해주고 성장을 위한 교육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하여 구성원들의 미래 지평을 확대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라.
Provide An Atmosphere When People Can Have The Resources To Grow, The Educational Tools Are Available, And They Can Expand Their Horizons.

18. 조직 계층 중이기 : 군살은 제거하라 !
Delayer : Get Rid Of The Fat !

19. 비전을 제시하라, 그 다음 구성원들이 회사의 비전을 자기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라 !
Express A Vision, Then Let Your Employees Implement It on Their Own !
20 작은 회사처럼 움직여라 !
Act Like A Small Company !

21. 도약을 목표로 삼아라 !
Go For The Quantum Leap !

22. 저항이 얼마나 큰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비용을 절감하라 !
No Matter How Great The Resistance, Get Those Costs Down !

23. 더 빠르게 하라 !
Get Faster !

24. 조직의 장벽을 없애라 !
Remove The Boundaries !

25. 사업 부서간의 상승 효과를 도모하고 통합된 다양성을 추구하라.
Search For the Synergies Between Your Businesses-Strive For Integrated Diversity.

26. 조직 구서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라 !
Empower Your Workers !

27. 조직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라.
Create An Atmosphere Where Employees Feel Free To Speak Out.

28.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
Listen To The People Who Actually Do The Work !

29. 불필요한 업무를 제거하라 !
Eliminate Unnecessary Work !

30. 조직 구성원들 앞에서 그들의 모든 질문에 대답하라 !
Go Before Your Workers And Answer All Their Questions !

31. 신속성, 단순성, 자신감을 목표로 삼아라 !
Aim For Speed, Simplicity, And Self-Confidence !

 

 

 

우에스기 요잔의 리더쉽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던 일본인으로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을 꼽았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 내로라하는 전국시대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메이지 유신 무렵의 선구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같은 세계적인 경영자, 전후 초대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등을 제쳐놓고 하필이면 일개 번(●)의 영주인 우에스기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긴 1960년대 초 케네디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일본 기자들마저 “우에스기 요잔이 누구지?”하며 서로 물어보았을 정도였다니 그럴 만도 하다. 18~19세기를 겹쳐 살았던 그가 일본에서도 최근 10여년 사이에 새삼스레 각광 받는 것은 만성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경제환경의 영향이 크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한낱 군수급에 지나지 않는 요네자와(米澤) 번의 영주 우에스기가 그토록 케네디를 감동시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번을 구해낸 그의 탁월한 개혁적 리더십이 그것이다.


우에스기가 일본에서 본격적인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직후 한국에서도 반짝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때를 같이해 번역 출간된 실명소설 ‘불씨’ 덕분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이 소설을 280여질이나 사 모든 비서관과 행정관들에게 읽게 하고 손명순 여사에게까지 일독을 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 도몬 후유지(童門冬二)가 “일본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걸 혼자 생각하고 있기가 너무 아까웠다”고 집필 동기를 털어놨으니 청와대로서는 매력적인 개혁모델이었음에 틀림없다.


돌이켜 보면 YS가 칼국수를 먹으며 깨끗한 개혁을 선도하려 했던 것은 우에스기가 끼니마다 밥과 국 하나씩만 식탁에 올리도록 하며 몸소 실천한 검약정신을 본받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스무살도 채 안 돼 영주가 된 우에스기는 당시 통치자나 무사계급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뽕나무 심기를 스스럼없이 하면서 개혁의 불씨를 키워 나갔다. YS가 더없이 적절한 벤치마킹을 했음에도 실패한 개혁으로 귀결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때 2백만섬에 이르던 봉토가 15만섬으로 영락한 요네자와 번을 일으켜 세운 우에스기의 리더십을 제대로 본받아야 할 사람은 사실 YS보다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국가파산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중책을 맡게 된 상황은 18세기의 요네자와 번과 닮은 꼴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수파이게 마련인 개혁세력의 불꽃을 피워내고 용의주도하게 기득권을 혁파해 가는 우에스기의 리더십은 시행착오가 많았던 두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눈여겨볼 값어치가 충분하다. 우에스기의 개혁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개개인의 경제사정을 괄목할 만큼 풍부하게 만든 데서 찾아야 한다.


의식과 경제가 따로 놀지 않았다는 점은 기득권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의 하나였다. 그것도 반드시 현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간과할 수 없는 성공기반이었다.


더욱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측근과 개혁주체세력의 철두철미한 관리이다. YS와 DJ가 모두 실패한 대목이자 노당선자가 끝까지 명심해야 할 부분인 셈이다. 우에스기에게도 측근관리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혁파 참모의 최고 선봉자인 다케마타 마사츠나의 탈선 탓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다케마타의 궤도 이탈은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마(魔)가 낄 수 있다는 것을 명증한다.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공세에 “개혁을 위해 더러는 때를 묻힐 필요가 있다”며 허물어진 다케마타를 우에스기는 측근들의 용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읍참마속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개혁의 길은 멀어도 백성들의 눈에 추호의 더러움도 보이지 않는다는 소신이 더 이상의 측근비리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노당선자가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우에스기의 개혁은 추진 엘리트를 양성하는 쿄조칸(興讓館)의 창설이다.

 

 

 

 

칭기즈칸의 전략과 리더십
칭기즈칸은 지난 97년 4월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 중 첫 번째 자리로 뽑힌 바 있다.

먼저 칭기즈칸의 리더십의 비밀 10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몽골족을 동기부여 시킬만한 "웅대한 비전"
②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한 점
③ 자신의 부하는 훌륭한 리더로 키워 낸 슈퍼 리더십
④ 끊임없는 상무정신을 고취시킨 점
⑤ 스피드를 중시한 전략의 구사
⑥ 통합적 패러다임과 거시적 안목
⑦ 모계중심의 성개방 의식
⑧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매우 효율적인 조직 구성
⑨ 과학기술과 교역의 장려
⑩ 유능한 참모의 기용

   IMF로 고통받는 아시아 국가들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다가오는 징조가 매우 짙다고 한다. 사실은, 환란 이전인 96년, 97년에 이미 유럽에서는 실업률이 급증으로 사회적인 불안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호황을 누리는 미국도 향후 어떠한 형태로 경제에 그림자가 드리워질지 알 수 없는 형국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 최강자인 미국이 경제적 약소국가들을 다그치며 자신의 안정적 앞날을 보장받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태가 이럴 즈음에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리더십이 모색되어 지고 있고 그 일환인 것인지 칭기즈칸의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첫째 칭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받을 점은 그의 "웅대한 비전"이다. 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 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17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 가는 신세에 처해졌다. 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 이었다.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 라는 말과 같이 소설과도 같은 모험과 역정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는데 어린 테무진이 결론지은 것은 그의 부족들이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잘 뭉치더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 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비전>과 다를 바 없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리는 자전거만이 서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 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 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고 그 꿈들은 하나씩 하나씩 실현시켰다.

   둘째, 칭기즈칸의 리더십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 그의 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 한다. 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도록 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금나라 100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고나 할까 땅을 빼앗거나 명분없는 약탈을 자제하였다.

   셋째, 칭기즈칸 리더십의 탁월한 점은 슈퍼 리더십이다. 중앙아시아며, 그리스 발칸반도, 모스크바, 베를린 등 엄청난 거리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 자신은 자신의 본토를 벗어 나 본 적이 없다. 십수년전 까지만 해도 벌판에서 말을 부리던 부하들이 대군사를 지휘하고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는 대장군으로 변신된 것이다. 부하를 육성함은 물론, 전권을 주어 현지의 왕을 임명하고, 인접국가에의 전쟁 여부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세계 정신적인 지주인 교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은 현지에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끔 현지의 지휘관이 철저히 알아서 하도록 믿었던 것이다.

   넷째, 그는 그의 부족들이 끊임없는 상무정신(尙武精神)에 젖어 있기를 바랬다. 그의 마지막 유언중의 하나가 "흙벽돌집에 살지 마라"라는 것이다. 흙벽돌 생활은 정착생활을 의미하며 곧 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허벅지에 살이 찌고 배부른 기름 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들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살림이 풍족해 지면 더 많은 재물에 욕심을 내고 단신의 군장이 온갖 재물보화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서로 많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오늘 날 우리의 위정자들이 험난했던 민주투사의 역정에서는 서로 잘 뭉치다가 정권을 잡으니 서로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배고픈 시절 굶주림을 면하려고 이역만리 먼 땅의 건설현장에 나가던 우리의 근로자들이 이제는 3D기피 현상에 빠진 것에 비추면 새삼 뒤돌아 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다섯 번째 그의 리더십 비밀은 스피드이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이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중원을 점령하는 2년여의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먼저 의사결정의 스피드주의를 보자. 원정군들은 온갖 작전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와 판단을 요구하는 결정임에도 그들은 철저한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고 "저 산을 넘어 가 보아야 그곳이 산일지 바다일지를 안다"는 모토로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테지만 이는 모르고 내린 결정보다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무모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조직이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몽고말과 손에 익은 작은 칼, 그리고 사냥터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활솜씨는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 서양의 병정들은 양철 허수아비와 같이 다루기 편한 연습상대에 불과했다. 중후장대가 아니라 경박단소가 세계를 점령한 것이다.

직관적 감각과 선이 굵은 대원칙 주의, 빨리 빨리를 노래하는 우리의 스피드광 기질은 언뜻 보아도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걸맞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여섯 번째 비밀은 그의 통합적 패러다임에 있다.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약하기하만 하면 이러 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얘기되는 Global Standard가 어떠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자국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정치적으로 자국에 도움을 주는 약소국에게까지 압박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칭기즈칸을 생각해 내고 그 회포를 풀었으리라.  "야야 칭기즈칸의 반만 닮아 봐라" 하고 말이다. 과거 아시아 지배의 야심을 불태웠던 일본의 작태에서도 한참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주장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천황, 종교를 섬기도록 강요하고 언어 사용을 강요한 것을 보면 일본은 역시 아시아 조차도 지배할 만한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지 못한 섬나라로서의 한계를 지녔다 할 것이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일곱 번째는 현대인의 생각을 앞지를 정도의 성개방 의식에 있다, 아울러 자손을 번영시키는 근본으로서의 여성 지위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을 받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어 2년여를 적의 장수에게 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아내는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나의 자식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그의 아버지 위업을 이어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국사에서 배운 바와 같은 고려시대의 공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빠르다. 궁녀로 끌려간 조선의 아녀자들은 그들의 원래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되는데 공녀 위씨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칭기즈칸의 리더십 비밀 여덟번째는 조직력에 있었다. 그의 대장군 밑에는 사단과 연대, 대대, 중대 등을 편성하였는데 그와 같은 군대의 조직 편성은 먼 훗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에는 없던 형태의 조직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은 뛰어난 조직가로도 유명한데, "어떤 조직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칭기즈칸은 <나라를 함께 세우고 고생한 자들> 즉 건국공신 88명을 천호장(千戶長)에 임명했다. 그 중에는 두세개의 천호를 가진 자들도 있었으므로 전체 95개의 천호가 편성되고 이것이 몽골이라는 국가의 사회조직이 되었다.

천호라고 하면 천명의 戰士를 제공할 수 있는 단위이고, 그 밑에 백호, 또 십호가 있어서 사회조직 자체가 군대조직과 동일하였다. 따라서 국가 사회조직이든, 군사조직이든 동일하였고, 칭기즈칸을 정점으로 완전히 재편한 것이다.

칭기즈칸은 종종 적군을 숫자로 압도하며 일렬 횡대로 진격하여 눈깜짝할 새에 포위하는 전법을 썼는데 이는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법이었다. 이러한 그의 조직력은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아무리 뛰어 난 장수라더라도 군율을 어기면 엄격하게 벌을 주었다. 그의 몽골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동력이었는데 그 키작기로 유명한 몽고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백성들이 자기 몸에 딱맞는 칼을 쥐고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몽골군의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000리를 내리 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부산과 평양까지의 거리쯤 될까?) 식량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의 말안장 밑에는 말린 고기가 깔려 있는데 사방 60센티 가량의 방석같은 고기가 소두마리 분량이라고 한다. 물만 부으면 완전한 우주식량이다. 적어도 병사 한명이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것이다.  몽골의 영광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소도 카라코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였고 일정 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칭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칭기즈칸의 리더십 비밀 아홉번 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 왔다. 서방의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바쳐 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인들은 이슬람교도 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 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이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한편 그들도 칭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 서로 다른 종교의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는 반면,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하였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이 교류되었다. 또한 칭기즈칸의 사후에 호레이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는데 기술을 가진 자들 즉 공예가나 직인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 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온갖 길에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으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 졌으니 세계 인류사의 과학문명의 발전을 3세기 가량 앞당겼다는 평가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칭기즈칸 리더십의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이다. 그는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늠름한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거란족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 자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이까?"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

칭기즈칸의 전략 전술에 관한 한 대만출신 재일기고가인 진재명씨를 따라 갈 사람이 없다. 칭기즈칸의 대륙지배 원리를 5전략과 5전술로 나누어 설명하여 일본내 베스트셀러작가가 되었는데, 그가 밝힌 5전략과 5전술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 진재명씨의 칭기즈칸 전략/전술

<전락편>

1. 突然襲擊 : 돌연습격! 상대가 깨닫기 전에 이룩한다.
구태의연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칭기즈칸의 탁월함은 기존의 사고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전쟁론의 작가 폰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이 군지휘에 있어 종전의 호령을 간단한 명령으로 대체하여 당시 지휘관들의 의표를 찔렀다고 얘기했지만 동양의 역사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미 기원전 삼국지의 제갈량은 선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군만마를 지휘하였다. 칭기즈칸 역시 호령한 사람이 아니다. 휘하의 막료에게 명령을 전달함으로서 10만 병사가 움직였다. 현대적 의미의 군대조직으로 대대, 중대, 소대를 편성한 사람이 칭기즈칸이다. 당시의 중세 유럽의 병사들은 장수와 막료 그리고 병사들이 있었을 뿐이다.

2. 速戰速決 : 속전속결 ! 이기는 싸움은 시간과의 승패! 시간을 끌면 불리해 진다.
                        (그의 기동력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 있다.)

3. 以戰養戰 : 이전양전! 전쟁을 할 수록 힘은 강해진다.
칭기즈칸의 탁월함은 - 물론 성공하였으니 탁월함이요, 실패라면 패인이 되겠지만 - 그의 집중력에 있다. 전쟁자원이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적군의 병기와 병졸을 곧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일단 항복해 오는 城은 그의 제국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일정량의 군량곡식과 병졸을 바쳐야만 했다. 이전양전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전쟁에도 나라가 핍박해 진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성할 수 있었다.

4. 以敵征敵 : 이적정적 ! 적의 힘으로 적을 누른다.
이미 힘을 다한 주변국가의 경계를 위해 그들의 적국을 서로가 감시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5. 以合攻散 : 이합공산! 힘을 집중하여 공격한다.


<전술편>

6. 殲殆滅盡 : 섬태멸진! 철저하게 격파한다.
그는 아래 10번의 전술 '단후무류'의 일환으로 섬태멸진의 전법을 쓴 것이 아닐까 한다. 섬태멸진은 제국내에 모반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반이 될 만한 세력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섬태멸진을 통해 후환을 없앤 뒤에 칭기즈칸은 원정길을 마음놓고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진씨의 주장에 다소 무리가 있다. 칭기즈칸은 오히려 후환을 대비하지 않는 등 대범함으로 주변국의 왕들을 복속케 하였다. 그의 섬태멸진 전법은 매우 끔찍하기조차 한데, 대항하는 성은 끝까지 함락하여 성안에 남아 있는 모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인 사건을 말한다.

7. 乘虛閃擊 : 승허섬격! 허점을 파악, 그것을 친다.
적국의 허점을 파악하여 그 허점을 타고 일격에 내려치는 전법이다.

8. 聲東擊西 : 성동격서! 연막전술후 의외의 곳을 친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이후 그리고 손자병법에 의해 보편화된 전술을 칭기즈칸의 전술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9. 迂廻旋避 : 우회선피! 싸우지 않고 이긴다.

10. 斷後無留 : 단후무류! 원조를 기대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 쓴다.
                         현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태조 왕건에서 본 인물별 리더십 유형
드라마 '태조 왕건'에 나타난 인간 유형…
아집 강했던 궁예, 견훤은 호방한 무사 기질

드라마 '태조 왕건'이 한때 장안의 화제였다.  왜 새삼 왕건인가. 남성들을 TV 앞으로 끌어 앉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삼국시대의 상황이 오늘날의 지역주의와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태조 왕건이 보인 리더십이 강력히 요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라 말하기도 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수도 적지 않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외모도 각기 달라 우리에게 흥미와 관심을 더해 주고 있다. 3걸에 해당하는 궁예ㆍ 견훤ㆍ왕건은 물론이고 그 휘하 장군들의 활약 또한 볼 만하다. 이들 인간 군상들을 구태여 몇 부류로 나눠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 은인자중형

우선 은인자중형의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문무를 겸비한 사람들이다. 학문의 연마를 통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하는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
왕건이 그런 인물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도선대사로부터 학문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도선 비기를 받은 것처럼 그리고 있다. 또 ‘고려사’ 고려세계의 기록에는 왕건의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도선이 태조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하늘과 통하여 도움을 받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왕건이 어린 시절에 학문을 배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후일 충남 논산에 있는 개태사의 발원문이나 진공대사의 비문을 친히 지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나주에서 그가 취한 태도에서도 그의 신중한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부장이었던 김언 등이 “공을 세웠는데도 포상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왕건은 “두 마음을 갖지 말고 맡은 바 임무만 착실히 하면 복이 올 것”이라 타이르고 있다.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선천적인 성격에다 깊이 학문을 연마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궁예 밑에서 22년 간이나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에 있을 때에도 권력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기록에는 “국사를 다스림에 사사로운 정을 누르고 근신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서야 할 때도 잘 알았다. 궁예의 측근이었던 아지태를 처단하고 난 후 그는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다시 변방인 나주로 자원하여 갔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대개 쉽게 빛을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세를 올바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설 ‘삼국지’의 유비나 일본 전국시대의 도쿠가와 이에야쓰 등이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가 농사를 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써 밥을 해놓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편안히 앉아 기다리다 그 밥을 다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 만큼 인간에게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유형의 인물로는 또 현재 병부령(현재의 국방장관)으로 나오고 있는 복지겸을 들 수 있다. 복지겸에 대해서는 기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처음 이름이 사괴였으며 현재의 충남 당진군 면천면 출신이라고 나와 있을 뿐이다. 그가 학식있고 신중한 인물로 나오는 것은 그의 가계에 의해 추측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이란 책에 보면 그의 선조는 당나라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복학사라 칭하는 자가 중국으로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지역민들을 보호하였는데 복지겸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학사라는 칭호로 보아 어느 정도 학식이 있었던 가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그도 은인자중하는 성격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왕건을 왕위에 추대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다음으로 견훤 정권에 참여했던 최승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신라 6두품 계열의 학자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인물이다. 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견훤의 휘하에 들어가 주요 외교 문서나 격문 등을 썼다. 태조 10년(927)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도 실은 최승우가 쓴 것이었다. 중국의 고사를 들어 왕건을 깨우치려 했고 견훤의 우위를 잘 기술하고 있다. 그의 학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국사에 간여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드라마에 따르면 궁예의 책사로 나오는 종간의 경우도 이런 유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종간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왕건 즉위 직후 처형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사’에 보면 그는 젊어서 중이 되어 간사한 짓을 많이 하였고 어질고 착한 이들을 많이 모함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하였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그는 아주 간사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궁예를 아주 좋은 인물로 그리고 있는 이번 드라마에서는 그의 역할과 태도가 정반대로 그려지고 있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과대망상형

다음으로는 과대망상형의 인물이 있다.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궁예가 그런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신라 왕실에서 쫓겨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궁예. 그가 청운의 뜻을 품고 왕이 되자 이제는 ‘동방의 대제국’을 꿈꾸며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도읍을 옮기고 있다.
큰 꿈을 꾸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가끔씩 큰 계획을 꿈꾼 적이 있다. 예컨대 최영의 요동 정벌이라든가 효종의 북벌론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가끔씩 사람들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개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히 판단하면 그것은 좀 무모했던 계획이 아닌가 한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지도자가 잘못 판단하여 대세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분에 넘치는 판단으로 백성들만 희생케 한 경우가 그것이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치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도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다. 많은 군사가 희생되었을 뿐 일본이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일본이 일으킨 2차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제패한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일본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었는가.
또 이를 옆에서 부추기는 인물들도 있다. 드라마에 보이는 아지태가 그러한 인물이다. 사실 아지태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913년 왕건이 시중의 자리에 있을 때 아지태가 같은 고향 사람인 입전, 신방, 관서 등을 참소하였으므로 이를 처단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는 본래 아첨하고 간사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물론 궁예의 심복이었기에 후일 나쁘게 평가한 데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의 내용대로 그가 과연 학식이 풍부한 학사였는지는 의문이다. 국호를 바꾸고 도읍을 옮기라고 권했던 것이 그였다고 보는 것도 지나친 억측이다. 오히려 그 건의는 왕건이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신라의 구원 요청으로 양주(현재의 경남 양산 일대)를 다녀 온 후 변방을 안정시키고 경계를 개척하는 비책을 궁예에게 올린 바 있다. 그 비책에 대해 궁예는 물론 좌우의 신하들이 다 주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비책이 진술된 1년 후에 도읍이 철원으로 옮겨지고 국호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 무장형

세번째로는 무장형의 인물들이 있다. 이런 유형의 인물들은 학식은 부족하고 무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단순함을 지니고 있다. 한번 결정하면 물러설 줄 모르고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의리를 대단히 중시한다.
견훤이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견훤은 그 출신부터가 신라의 군인이었다. 군인으로서 서남해를 지키다가 세력을 모아 후백제의 왕이 된 것이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또 대개 전진만 있지 후퇴는 없다. 여기에 길들여진 견훤은 한번 계획을 세우면 후퇴하지 않았다. 대야성(합천)에 대한 무모한 공격도 그 예 중의 하나다. 금성(나주)에 대한 왕건의 공격 가능성을 알고도 신라 정벌을 계속하는 드라마의 내용도 그 성격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909년에는 군세만 믿고 왕건의 수군을 대적하다 크게 패하여 몸만 겨우 살아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런 유형의 인물로는 또 수달(동물 이름을 딴 인물. 본명은 능창)을 들 수 있다. 그는 무력만을 믿고 견훤에게 대들었다가 크게 패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나주 태수 나총례의 꼬임에 빠져 방비를 게을리하다 금성을 잃는 것도 그의 단순한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무력만을 믿고 날뛰다 결국은 왕건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궁예에게 압송되어 여러 사람 앞에서 처형당하였다.
유금필도 이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매우 우직하였다. 왕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였다. 왕건이 주저할 때마다 전투에 앞장섰다. 모함을 받아 섬에 귀양갔을 때도 왕건을 원망하지 않았다. 귀양에서 풀려나자 마자 다시 사지로 뛰어들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는 그가 1등공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술희 같은 인물도 이 유형에 속한다. 박술희도 복지겸과 같이 현재의 충남 당진군 면천면 출신이다. 그는 천성이 용감하고 육식을 좋아하여 두꺼비나 개미까지 다 먹어치웠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그는 학식을 겸비한 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드라마에 그가 대주도금을 만나러 갔다가 그의 아버지 아자개 앞에서 유교 경전을 외워보이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다.
한편 그는 나주 오씨 집안과 가까워 나주 오씨의 아들인 무가 태자로 책봉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후백제 신검과 마지막 격전을 할 때 무와 같이 천안에 선발대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죽은 후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럼에도 그의 후손이 영달하지 못한 것은 그와 그의 집안이 학자적 집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전쟁시에는 필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평화시 정치가로서는 부족한 인물들이다. 돌아갈 줄도 모르고 남의 말을 잘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면 대개 독재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군인들이 집권하면서 독재정치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 궁예ㆍ견훤ㆍ왕건

후삼국 3걸의 통치형태도 각기 달랐다. 궁예는 아집이 강했다. 통치철학이 확고했다. 너무 자신에 차 있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했다. 이른바 독단형이다. 종간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천도를 결정하고 아지태의 말을 신임하면서도 궁궐자리는 자신의 의견대로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스스로 지은 불교경전을 석총이란 승려가 비판하자 그를 죽여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여 전제정치를 시도하다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견훤의 통치형태는 기록상으로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드라마 상으로 볼 때 그는 무장다운 호방형의 통치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을 쉽게 믿고 쉽게 내친다. 능환을 책사로서 중용하다가 최승우가 나타나자 그를 신임하는 것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의 아들인 신검 형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냉혹하게 혼내주는 장면도 그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왕건의 통치형태는 의견수렴형이다. 부하나 신하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뒤에 결정하는 형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신하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백서성이란 관청을 설치하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지도자나 참모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에 따라 정책방향이 180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개인 생각으로는 먼 앞날을 생각하면서도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아닌가 한다.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한편 확실하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통치 형태 또한 성공적인 리더십이라 하겠다.
(김갑동 대전대학교 교수)

 

 

이순신 경영학

서강대 지용희 교수

● 최악의 역경 헤친 23戰 23勝은
    
  1998년12월16일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순국 4백주기이다. 오늘날도 국란(國亂)이지만 4백년 전에도 국란이었다. 지용희(池龍熙) 서강대 교수(경영학)는 이순신 장군을 단지 임란을 극복한 무장(武將)으로만 보지 않고, 그의 정신과 전략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전쟁을 이기는 탁월한 경영 비책(秘策)이라고 내놓는다. 池교수의 '이순신 경영학’을 기념시리즈로 싣는다(중앙일보)

  지구촌 시대다. 경제의 국경은 희미해지고 무한경쟁 체제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여기서 패해 초라한 처지가 됐다. 국제경쟁력이 취약해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외채에 허덕이다가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까지 받게 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하루 빨리 극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23전 23승 한 이순신 장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 무력전이든 경제전이든 전쟁은 전쟁이며,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원리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의 청렴결백과 높은 신뢰성,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온 유비무환의 자세, 솔선수범과 인간애에 바탕을 둔 리더십, 용기와 결단, 거북선 개발과 같은 창의성, 철저한 기록정신, 뛰어난 정보활용 능력과 전략 등은 오늘날 우리가 경제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순신에게 참패한 일본 사람들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해군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세계 제일의 것을 본받으려는 벤치마킹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이순신의 정신과 전략을 깊이 연구했으며, 또 그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함대의 한 함장은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싸우기 위해 출항하기 전 이순신의 영혼에 도움을 빌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관리 중 거의 유일하게 청렴한 인물이었고, 군사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용기가 실로 기적이라 할만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 그 후 잊혀졌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해 메이지시대 해군이 창설되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했다. (‥‥)  당시 일본인들은 러시아제국이 동아시아 병탄의 야망을 갖고 있다고 보았으며, 동진해오는 발틱함대를 그 최대의 상징으로 여겼다.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한 척도 남김없이 쳐부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동아시아를 위한 일인 이상 옛날 동아시아가 낳은 유일한 바다의 명장인 이순신의 영혼에 빌었다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에게 참패한 일본 사람들은 그를 연구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해전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선을 병합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업적과 전략을 깊이 연구하거나 본받지 못해 임란 이후에도 외침에 시달리다 결국 나라까지 빼앗겼다.

앞으로 경제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우리는 무적함대와 다름없는 일본의 자동차회사, 미국의 컴퓨터회사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본격적인 경제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과연 얼마나 냉철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에 대비하고 있는가. 최악의 역경속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의 정신과 전략은 이 점에서 귀감이 될 것이다. 

● 죽을 힘 다하는 기업가 정신을…

 자동차왕 헨리 포드, 컴퓨터황제 빌 게이츠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업가들이다. 거의 빈 손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냈다. 과연 무엇으로 가능했을까. 바로 기업가정신이다. 자금난·인재부족 등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용기와 결단, 희생의 감수, 솔선수범, 끈질긴 추진력 등을 발휘해 이를 극복했다.
 
 기업가정신 없이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고전경제학의 대가인 영국의 앨프리드 마셜은 기업가정신은 기사도정신과도 같다고 했다. 일본 기업들의 강점 중 하나는 그들의 무사정신이라는 말도 있다.
이순신은 기업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업가정신의 진수(眞髓)를 보여주었다. 그는 상상하기 힘든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싸워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만큼 악조건 아래서 싸운 장군이 있었을까. 연전연승해 국가에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웠지만 누명을 쓰고 죄인이 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신세가 됐다. 세계 제일의 해군제독이 죄인이 되고 육군의 무등병(無等兵)으로 강등된 셈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게 참패해 조선 수군이 괴멸된 후에야 임금인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해 일본 수군과 싸우도록 했다. 한마디로 병사· 배· 무기· 군량미 없이 홀몸으로 막강한 일본 수군과 싸우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그와 같이 외롭고 딱한 처지의 해군 사령관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당시 이순신은 억울한 죄로 시달린 나머지 마음과 몸이 피폐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같이 싸울 수군을 모집하기 위해 일본군의 추격을 무릅쓰고 이 고을 저 고을 찾아다녔다. 텅 빈 관가의 창고를 뒤져 무기와 식량을 모으고, 칠천량 해전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12척의 배를 찾아내 남해안을 휩쓸던 일본 수군을 막을 태세를 갖췄다. 이런 와중에 조정은 12척의 배로는 도저히 2백척이 넘는 일본 수군을 막아낼 수 없다며 이순신에게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해 그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 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戰船)이 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적 수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적고 미미한 신하에 불과하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12척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돼 장수들도 도망가고 임금마저 전투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정도의 위급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고 오히려 임금을 설득하고 명량대첩이라는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순신이 12척으로 일본의 대함대를 격파했듯이, 우리 기업도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하고 적절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세계적인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없는 것만 탓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시설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그리고 배경이 없어서 할 일을 못한다고들 야단이다. 지금이야말로 이순신이 보여준 기업가정신이 필요할 때로 보인다.

● 정보로 무장 스피드 경영을
 
  군사전략이든, 경영전략이든 기본은 같다. 시대가 변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2천5백년 전에 쓰여진 '손자병법'이 오히려 새로움을 준다고 극찬하는 세계적인 전략가도 있다. 이순신이 보여준 23전23승의 전략은 이런 점에서 경제전쟁 시대에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선 적이나 경쟁기업을 이기기 위해선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기의 강점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집중 공략해야 한다. 그러러면 자신의 처한 환경을 면밀히 파악하고 자기의 강,약점은 물론 상대방의 강, 약점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
  이순신은 이같은 전략의 기본에 충실했다.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潮流)를 훤히 꿰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현장답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정보원과 정탐선을 파견해 적의 규모와 이동상황 등을 세밀히 파악했다.
  이순신의 이같은 정보중시 전략은 정보화시대인 지금 더욱 긴요하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생생한 현장 정보의 수집과 활용뿐 아니라 정보고속도로, 경영정보시스템 등 정보의 하부구조를 효율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순신은 지형, 조류 등 자연환경과 우리 수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적의 약점을 집중 공략했다. 일본 수군은 칼싸움에 능해 일단 배위에서 싸우면 그들이 유리했다. 또 그들은 조총을 갖고 있었으나 화포는 미약했다. 이러한 적의 강, 약점을 파악한 이순신은 화포를 집중 발사해 적선의 접근을 막으면서 이를 격침시켰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많은 사업체를 매각하고 세계에서 1, 2등 하는 부문만 집중 육성해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었다. 반면 우리 기업중엔 지나치게 많은 업종에 진출해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에선 대기업이라도 세계적인 기업과 비교하면 매우 작다. 따라서 재벌 기업이라도 전문분야를 선택해 세계 제일이 되도록 모든 자원과 노력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빠른 기동력이다. 그는 일본 수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서 기선을 제압하고 적이 공격해올 틈을 봉쇄했다. 또 신속한 함대 운용이 특기였다. 적 함대를 공격하는 즉시 빠져나왔다.
  지금 기술과 시장 등 경영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기민성이야말로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가만히 있는 목표물은 좋은 공격대상이 될 뿐이다. 끊임없는 개선과 혁신으로 경쟁자가 겨냥하기 힘든 목표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환경이 돌변하고 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경영기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에 휩쓸려 전략의 기본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 경영전략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유행처럼 바뀌는 기법을 좇는 것은 모래 위에 화려한 누각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렵고 급할수록 기본원리에 충실하길 권한다.    

● 자만하면 경쟁서 진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에 철저히 대비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겸손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싸움에서 전승(全勝)했음에도 "나는 나라를 욕되게 했다.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적까지 완전히 소탕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던 것 같다. 이런 자세 때문에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더욱 철저히 대비했을 것이다. 오만한 사람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랄 게 없었다.                                       

  임란 직전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갔다 온 김성일(金誠一)은 "도요토미의 눈은 쥐와 같고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하잘 것 없는 위인이니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면서 무시하는 듯한 말로 조정에 보고했다. 전쟁 전에는 일본을 한칼에 무찌를 수 있다고 큰소리 친 장수도 막상 일이 터지자 도망만 다녔다.                               
  오만과 자만! 이것이야말로 모든 전쟁이나 경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자만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기는커녕 문제 자체가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남이 문제점을 지적해 주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는 치밀하고 철저한 대비를 할 수 없다.
  세계 제일의 기업이라도 그 경영자나 종업원들이 자만에 빠지면 곧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국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인 GM의 경영자들은 한때 자만심 때문에 일본 자동차의 경쟁력을 과소평가했다. 일본 자동차들이 미국에 처음 진출했을 때 마치 장난감 같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이런 오만으로 일본 자동차의 미국 진출에 소홀히 대비해 GM은 큰 손실을 보았다. " I BM이 가는 곳에 컴퓨터 산업이 있다"는 말이 있었듯이 세계 컴퓨터산업을 선도하던 IBM도 한때 자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GM· IBM과 같은 세계 초일류기업의 경영자들이 자만에 빠져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세계에서 일등을 하다 보니 인간심리상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초일류기업과는 거리가 먼 국내기업들의 경영자나 종업원들이 오만해진다면 어떻게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IMF 구제금융 이전에 우리는 지나치게 자만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자기 기업과 자신의 능력을 세계 제일인 양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식 세미나 석상에서 외국사람들이 자기 기업의 기술과 경영 방법을 배우러 끊임없이 찾아온다고 떠벌리는 경영자도 보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후진국 사람들이 배우러 온 것이었다.

  세계적인 초일류기업들은 자만을 경계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불평 많은 고객들을 우대하고 오히려 이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이제 우리도 우물안 개구리 같이 만만한 경쟁기업이나 고객만 상대하면서 오만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세계 제일의 기업을 경쟁상대로 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메워나가자.
  겸허한 자세로 까다로운 고객의 불평을 경청하면서 혁신을 감행해야 진짜 경쟁력이 붙게될 것이다.

● 완벽한 준비가 불량률 ‘제로’ 만든다

이순신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예를 들어 첫번째 싸움인 옥포해전에서 26척, 한산대첩에서 59척, 명량대첩에서 123척의 적함을 격파하거나 나포했지만 자신의 전함을 한척도 잃지 않았다. 잇따른 완패에 크게 위축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 함대와 맞서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문서로 하달하기에 이른다.

이순신이 수많은 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다. 임진왜란 전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로 군기가 해이해졌고 적당주의가 판을 쳤다. 평화에 젖으니 고된 훈련에 불평도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부하들을 감복시키고 고된 훈련을 이끌어 나갔다. 그 결과 그는 20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해군전략가 빌라드(G.A.Ballad)제독이 극찬할 정도로 일사불란한 함대 운용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순신이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던 한산도 활터에 가보면 그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대비태세를 잘 보여준다. 화살로 적을 명중시키려면 적과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거리감각이 무뎌져 다른 배에 탄 적을 정확히 겨냥하기가 힘들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순신은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활 쏘는 곳과 과녁을 배치할 수 있는 곳을 활터로 개발했다. 이런 활터는 이곳을 빼고는 국내에 없다고 한다.

무한 경쟁시대에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완벽성에 도전해야 한다. 이 점은 세계적인 컴퓨터회사인 IBM의 기업이념이 ‘완벽성의 추구’라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IBM은 모든 업무·제품·서비스의 완전무결(zero defects)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완전성의 추구가 생활의 기본이 돼야 하고, 모든 직업이 최상의 방법으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수행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자동차는 2만여개의 부품을 조립해 만든 제품이다. 부품1만개 중 한 개의 불량품만 있어도 자동차 한대에 2개의 불량부품이 끼어들게 된다. 이 정도의 품질 수준으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초일류 자동차회사들은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해 우리는 자동차보다도 훨씬 부가가치가 높고 복잡한 제품, 이를테면, 항공기와 같은 제품에서도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항공기의 경우 부품수가 훨씬 많고 고도의 초정밀성이 필수적이므로 더욱 완벽한 작업이 요구된다.

인간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또한 완벽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그렇다고 목표치를 낮추게 되면 의욕이 저하되고 게을러지게 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완벽성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자.

● 신뢰보다 더 큰 성공 밑천은 없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괴멸된 후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피난민이나 패잔병까지도 그와 함께 싸우려고 모여들었다. 또 일치단결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뿐 아니다. 피난을 가는 노인들까지도 그를 도우려고 애썼다. 이순신은 "노인들이 길가에 늘어 서서 다투어 술병을 가져다 주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제로 권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가난했지만 '신뢰'라는 재산을 크게 쌓았다는 점에서는 정말 부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그를 믿고 존경했기 때문에 기꺼이 따르고 도왔다. 그가 주위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깨끗한 몸가짐이었다. 그는 출장갈 때 지급받는 쌀에서 남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도로 가져와 반납했다. 또 상관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해 저지시킨 적도 있다. 이런 성품 탓에 이순신은 윗사람에게는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부하들은 그를 진심으로 신뢰했다.
  우리는 예부터 진퇴가 분명해야 훌륭하고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순신은 강직한 성품으로 세번 파직당하고 두번 백의종군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의 인생관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항복에 따르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해 한 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이순신의 부하사랑은 남달랐다. 장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모함을 받을 정도로 부하들과 마음을 트며 같이 일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궁색한 사람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준 적도 있다. 이순신의 이같은 따뜻한 보살핌과 인간애로 인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순신은 오랫동안 쌓은 신뢰라는 재화(財貨)를 바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신뢰를 잃으면 한 국가나 기업도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우리가 IMF구제금융을 서둘러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외국의 금융기관들이 우리를 불신해 융자해준 자금을 긴급히 회수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5백억달러를 넘었지만 제2의 외환위기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어떤 계기로 외국인들이 우리를 또 불신하게 되면 냉혹하게 다시 자금을 회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팽배한 국가는 지하자원같은 물질적 재산이 많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수 없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에선 개인 또는 기업간 거래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신뢰성이 낮다.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만든 계약서라도 상대방의 기회주의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의 거래비용이론에서는 신뢰를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뇌물을 없애고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며 정보 공개로 투명성을 높이면서 끊임없이 나눔의 삶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신뢰라는 재산을 쌓아나가야겠다.

● 전쟁터서도 꼼꼼히 日記 남겨… 지식 기록 정신이 바로 경쟁력
 
  이순신은 임진왜란7년의 와중에서, 때로는 토사곽란(吐瀉  亂)에 시달리면서도 쉬지  않고 일기를 써 귀중한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다. '난중일기'에는 전쟁에 관련된 많은 기록뿐만아니라 당시 사회상에 대한 자료까지 담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그는 또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서도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보고했는데, 이 자료들은 현재 '임진장초(壬辰狀草)'로 남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임란이 어떠했으며, 이순신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겼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그의 투철한 기록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고려자기를 세계에 자랑하지만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지금도 이를 똑같이 재현하지 못한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를 지닌 지식이나 기술을 기록으로 남기면 바로 국가와 후손들의 재산이 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기록은 일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꾸준히 기록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지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일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후세에 큰 문화유산을 물려주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의 전투에서까지 혼란과 시행착오를 거듭했을 것이다. 각종 업무를 기록하는 일지와 개인의 일기는 물론 주부의 가계부까지도 그 유용성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기록을 소홀히 해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 기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기술자가 나가버리면 똑같은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10년 전까지 만들었던 제품도 보관하고 있는 기록이 없어 다시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10년 전의 기술을 알지 못하는데 거기서 어떤 미래의 기술이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주 못살던 나라에서 단기간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까닭에 많은 후진국이 우리의 과거 기술을 구매하기를 원하지만 기록이 없어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화학과 교수는 자기가 하고 있는 실험을 3백여년 전 독일에서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그 때의 자세한 실험결과를 사 본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에 놀랐다고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지금같이 경쟁이 치열한 때엔 '아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바꿔야 한다. 아는 것, 즉 지식이야말로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이 때문에 지식경영이 강조되고 있다. 지식은 꾸준한 기록에 의해 축적돼야 널리 활용될 수 있다. 종업원 개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을 모아 기록하면 회사의 지식은 쌓인다. 어느 한 종업원이 나간다고 해도 회사의 업무에 지장을 받는 일이 없다. 미국 기업들은 생산·판매·구매·인사·재무·회계 등 많은 업무의 처리방법을 자세히 기록한 지침서를 만들어 실제업무에서뿐 아니라 종업원 교육용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자신의 지식을 자신만을 위해 쓰다 소멸시킬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록정신으로 더 큰 용도를 위해 남기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1998년 12월 16일은 충무공의 4백주기이다. 전쟁터에서도 일기를 남기던 그의 치열한 모습이 유난히 눈에 선하다.

※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을  상세히 남긴 이순신 장군의 일기는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며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 거북선 같은 혁신이 필요한 때

  이순신은 배를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거북선같이 뛰어난 혁신제품의 설계와 제작을 주도했다. 이순신의 조카로 수군에 종군한 이분(李芬)은 거북선의 탁월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사 적선이 바다를 덮을 정도로 많이 몰려온다 해도 거북선이 적의 선단 속을 출입 횡행하면 향하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해전 때마다 이 거북선으로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                       
 
  기술자도 아닌 이순신이 어떻게 거북선과 같은 창의적인 제품의 설계와 제작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하고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함 개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기술자들과 함께 거북선의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결과였다.    
  일본군은 우리에겐 없는 조총을 갖고 있었다. 또 그들은 칼싸움에 능했다. 이순신은 적의 강점인 조총을 무력화하고, 적이 우리 배에 올라와 칼싸움 할 기회를 봉쇄하기 위해 배 위를 목판으로 덮은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의 목판 위에는 돛을 올리고 내리기 위한 좁은 십자로를 제외하곤 모두 송곳을 꽂아 사방 어느 곳에서도 적군이 발을 디딜 수 없게 했다. 또 배 안에선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배안을 볼 수 없었고, 거북머리와 거북꼬리 부분, 배의 좌우에도 화포를 쏘는 구멍이 있어 적이 거북선을 포위하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거북선은 당시 획기적인 신제품이었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신제품개발· 품질향상· 원가절감을 위한 기술혁신, 새로운 경영방법을 도입하기 위한 경영혁신 , 새로운 판매방법을 활용하기 위한 마케팅혁신, 기업  내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혁신, 참신한 디자인을 도입하기 위한 디자인혁신, 애프터서비스의 획기적 개선을 위한 서비스혁신 등 많은 분야에서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이순신이 거북선 같은 혁신제품 개발을 주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 기업· 대학 등 어떤 조직체든지 성공적인 혁신을 추진하려면 지도자나 책임자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저명한 경제학자 슘페터가 지적했듯이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수반해야 하므로 반드시 기존의 것을 없애거나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업이 혁신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업 책임자인 기업가나 경영자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하다. 혁신 추진 여부와 혁신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원배분은 이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혁신의 중요성에 대한 경영자들의 인식이 높아 가고는 있으나 아직도 경영에서 혁신을 우선 추진한다는 '전략적 의지(Strategic Intent)'가 미흡하다. 한국 경제는 이미 혁신주도 단계로 진입해야 함에도 경영자들이 아직도 저임금이나 규모의 경제에 의존한 저원가 전략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기업가나 경영자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의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혁신을 주도한다는 전략적 의지를 다져야겠다.

● 경제戰 지휘할 경영자 키워야

    이순신 장군이 자살했다면 놀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그의 자살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부하였으며 후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유형(柳珩)에 따르면 이순신은 평소에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숙종때 광주목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민서(李敏敍)도 "이순신은 전쟁 중에 투구와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사망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순신은 모략과 음해가 판치는 세상에서 세번씩이나 자리에서 쫓겨났고 두번씩이나 백의종군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는 국가적 위기에서 온 몸을 다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전쟁 중임에도 감옥에 갇혀 죽을 뻔했다. 이런 세태 때문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살아 남는다 해도 전쟁이 끝나면 또 다시 모함을 받아 죽게 될 것을 짐작하면서 적의 조총도 피하지 않아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자살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도 많다. 이순신은 평소 생사와 화복을 천명에 맡기고 전투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모함과 벌이 싫어 미리 자살했다는 것은 그의 인품과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순신 자살설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시 세태 때문에 이순신 자살설이 일면 설득력을 갖게 됐고, 이런 세태는 그가 전사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했기에 지금 우리 사회의 풍토가 크게 나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순신같이 청렴한 공직자가 오히려 요령없는 사람으로 '왕따'가 되는 경우도 많다. 정부뿐 아니라 기업 등 각계각층에서 이런 세태가 만연하고 있음을 자신있게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안타깝지만 거의 없을 것이다.
 
  한 국가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본은 인간자본(Human Capital)이다. 또 ‘기업은 사람이다’는 말도 있다. 이같이 한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인재이므로 회계학에서도 기업의 인적자원을 자산으로 명시하는 인적자원회계(Human resource accounting)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혹독한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정부·기업 등 각계각층에서 이순신 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이순신이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유성룡· 권율· 조헌· 이원익 같이 자기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그를 적극 지원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자신과 가깝지 않고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 해도 강직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감싸주고 도와주는 용기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기 이익에 눈멀어 훌륭한 사람을 모함하거나 내쫓는데 앞장서거나 이런 일에 함께 휩쓸리는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4백년 전의 나쁜 세태가 나라를 구한 한 영웅의 삶에 좌절을 안겼듯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이순신들을 죽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지금 많은 이순신들을 살리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경제전쟁에서 패해 남이 우습게 여기는 민족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자

'세계의 리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ceo성공비법 배우자  (0) 2005.11.10
리더쉽 프로그램  (0) 2005.10.12
리더쉽 종합모델  (0) 2005.10.12
가을  (0) 2005.09.19
ceo84% 스트레스로 고통받는다  (0) 2005.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