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인물-스토리

잘나가던 금융ceo 택시기사 됐네

핫이슈정리왕 2005. 7. 28. 23:27
2005.7.28 (목) 11:54   헤럴드경제   헤럴드경제 기사보기
잘나가던 금융CEO 택시기사 됐네

인생의 2막 연 김기선씨


"잘 나가던 금융맨이었을 때는 그렇게 반기던 친구들조차 운전복 차림의 나를 보면 슬슬 피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핸들은 잡지 말았어야지…`하는 표정으로 말이죠. 그러면 전 속으로 그러죠. `야들아, 택시기사가 얼마나 좋은데. 남 눈치 안 보지, 훨훨 돌아다니지, 치매 안 걸리지, 정년 없지… 야, 열두 가지도 넘어`라고요."
운전사가 모는 최고급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경영에 골몰했던 금융계 최고경영자(CEO)가 앞자리 운전석으로 옮겨 앉는 `180도 대변신`을 꾀해 화제다. 주인공은 39년의 금융계 생활을 접고, 2001년부터 택시기사로 뛰고 있는 김기선(62) 씨. 김씨는 지난 5년간의 기사생활을 짚어본 `즐거워라 택시인생`이라는 책(웅진지식하우스)을 펴냈다.
선린상고 출신의 김씨는 은행원의 인기가 한창 좋았던 1963년 서울은행에 입사해 중앙투자금융, 동아증권, 영풍상호저축은행을 두루 거친 금융전문가. 은행원 생활 틈틈이 명지대 상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도 수료했다. 더구나 IMF 시절 금융계에 불어닥쳤던 칼바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대표이사직을 3번이나 연임했던 실력파였다. 그런 그가 사장임기가 1년이나 남았는데 돌연 택시기사로 변신한 것은 무슨 사연 때문이었을까.
"20년 전부터 택시운전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믿겠어요? 월급쟁이는 어차피 정년을 피할 수 없는데, 퇴직했다고 멀쩡한 몸을 놀릴 순 없잖습니까. 그래서 환갑에는 반드시 개인택시를 몰겠다고 계획을 세워 뒀죠." 인생을 한 바퀴 돌아온다는 환갑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
`인생의 2막`을 택시운전으로 시작한 그는 요즘 노동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며 즐거워한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피를 말렸던 시절과는 달리 인생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남(승객)과 호흡을 맞추며 핸들을 잡는다는 것.
그는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있을 때보다 열 배, 스무 배 마음이 편합니다. 75세가 넘는 택시기사가 서울에 700명이나 되는 거 아세요? 80세 넘는 분도 30명이나 됩니다. 주로 낮에 4~5시간쯤 일하시는데 참 보기 좋죠"라고 말한다.
이어 "우리도 이제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만큼 눈높이를 낮추고,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경우 노인들이 구두도 닦고, 여관 벨보이도 하며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느냐며 "나이는 벼슬도 아니고, 자격증도 아닙니다. 자식이 곧 종신보험이고, 노후대책이던 시대도 지나갔고요. 부질 없는 체면과 허세를 말끔히 지워내는 순간, 인생 후반전이 멋지게 펼쳐집니다"라고 강조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부지런히 도심을 누빌 거라는 김씨는 "퇴직자와 노인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기분 때문일 것"이라며 "아직 창창하게 남은 노년의 삶, 사회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여생을 개척해 나가려는 자세가 핵심 아니겠느냐"고 힘주어 말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