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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양육위해 선택받은 요셉의 크리스마스

핫이슈정리왕 2008. 1. 25. 06:26
요셉의 크리스마스 (마 1:18-25) 07-12-23 14:00
  글쓴이: 이정선목사     조회 : 192    


나사렛 동네의 어귀에 작은 목공소를 새로 열고 업그레이드된 기술과 서비스로 동네 사람들의 신망을 받던 청년 목수 요셉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목공소 뒤편에 신방을 꾸며놓고 결혼 준비를 다 했는데, 결혼식 날짜를 눈앞에 다가왔는데, 결혼을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요셉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지요. 이스라엘의 관습은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즉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요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케이스에 적용될 수 있는 율법 조항은 신명기 22장 23-24절입니다.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에 의하면, 약혼한 여자는 법적으로 결혼한 여자와 같이 취급됩니다. 그래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웃의 아내’라고 표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 의해서 임신이 되었다면, 둘 다 돌로 쳐 죽여서 악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요셉이 사랑했고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 마리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될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성경이 그에 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멀리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 그의 직업은 목수였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부터 요셉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즉 구속사에서 요셉이 차지하는 의미와 위치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실 때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진 권력자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어린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는 일반적인 양육과정을 위한 가정이라는 테두리와 보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책임과 역할이 바로 요셉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아기를 해치려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도 수행해야 했습니다. 즉 요셉은 메시야의 양육과 보호라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남자로 태어나 살다 간 모든 사람들 중에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서양의 전설에 성배를 수호하는 기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배를 수호하는 기사라면 최고의 영예를 가진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그의 목숨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사명을 받았으니, 요셉이야말로 최고의 영예를 가진 남자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지만, 독단적이고 일방적으로 일을 행하시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요셉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요셉이었을까요? 우선 요셉의 생애를 잠깐 살펴봅시다. 그가 왜 조상의 땅 유대를 떠나서 멀리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수백 년 전 할아버지 때 정착을 했는지, 아니면 아버지를 따라 이주를 한 이주민 1.5세대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향을 멀리 떠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적하라는 황제의 칙령에 따라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먼 여행을 해야 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떠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각 지파와 족속에게 땅이 기업으로 분배되었고, 그 땅을 파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았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땅이 원래의 주인이나 후손에게 돌아옵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땅을 받은 사람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규범이 잘 지켜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 경제활동이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앞서게 된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가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와 함께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경제활동 또는 시장경제라는 명목 하에 도덕과 정의를 팔아서 부를 축적하는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경제활동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기업으로 받은 땅이라는 개념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남은 지파가 유다 지파 밖에 없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땅을 다시 분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신약 시대의 갈릴리는 변방이었고, 그곳 주민들은 2등 국민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가던 요셉은 특별할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이름 없는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처지는 그런 자부심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원대한 포부나 거창한 비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꿈이 있다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믿는 것이 있다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야의 도래를 보지 못하고 그렇게 이름 없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을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그 요셉이 포함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의 삶이 메시야가 오시는 현장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자꾸 궁금해지는 것이 왜 하필 요셉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는 예루살렘의 주류 세력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지도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청빈하고 존경받는 랍비도 찾아보면 있을 것이고, 아기 예수에게 최고의 교육과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유력한 집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시골의 목수를 선택하셔서 그 엄청난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세주이신 메시야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잘것없는 시골 목수에게 그 귀하신 몸을 의탁하신 것은 우리 추하고 더러운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친구로, 가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처럼 이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높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배를 수호하기 위해 선택된 기사들은 칼싸움도 잘하고 충성심도 깊어야 되었겠지만, 하나님은 들의 풀처럼, 강가의 돌멩이처럼 아무런 특별할 것도 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의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의 목수 요셉에게 아기 예수를 맡기신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그래도 왜 요셉이 선택되었을까 궁금해서 더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요셉처럼 귀하고 영광스러운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면, 여기 요셉의 행동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한 마음과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내일 모레 결혼을 앞두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눈이 뒤집히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 같으면 칼부림이 나서 여러 사람이 다쳤겠지요. 아니면 배신감에 너무 속이 상해서 일도 내팽개치고 술만 퍼마셨을지 모릅니다. 군인 같으면 총 들고 탈영을 했겠군요. 침착한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해서 두 사람 모두 죗값을 치르게 했겠지요. 요셉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라고 왜 고민이 안 되었겠습니까?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최종적인 결정은 이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드러낸다는 것은 마리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마리아를 죽음에 몰아넣지 않고 살려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와의 약혼을 파기한다면 나중에 마리아의 임신이 드러나더라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임신하게 한 남자를 잡아다가 그 처녀와 결혼을 시키는 것이 율법입니다. 요셉으로서는 몹시 섭섭하고 화도 나겠지만, 만약 마리아에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을 증오하고 그에게 복수하기보다 오히려 복을 빌어주며 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깨끗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메시야를 맡아 돌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위해 일합니다.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귀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가운데서 정직하지 못한 일을 행하고 남 몰래 부끄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일은 참 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하는 일이겠습니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마음이 편하시겠어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먼저 우리의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마음 놓고 맡기실 것입니다.

또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요셉으로서는 최선의 결정을 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의로운 결정이었고,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요셉에게 그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마리아를 내보지 말고 아내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육신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초특급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불륜의 씨앗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목이 타도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에 요셉은 어쩌면 기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아내로 데려온다는 것은 살이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었고, 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하는 믿음으로 요셉은 메시야의 양육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사렛 시골의 목수 청년 요셉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예를 차지한 행복한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이 경험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요셉의 크리스마스가 여러분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정직한 영과 순종의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변방 시골에 살고 있어도, 우리가 아무리 이름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은혜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의로운 청년 요셉에게 찾아와 자신을 맡기셨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께서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늘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이 성탄절에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